다이어리

독서의 배신

딸내미는 자타공인 ‘책벌레’였다.
유치원 시절부터 눈만 뜨면 책꽂이 앞에 붙어 앉아 책을 파먹던 게 일상이었다. 밥 먹을 때도, 화장실 갈 때도 당연히 책. 오죽하면 우리 집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 '독서 금지령'이었을까.
​어느 날은 거실 책장의 모든 책을 노끈으로 꽁꽁 묶어버린 적도 있었다. 내 평생 잔소리는 늘 "책 좀 그만 봐"였다. 사실 시력이 어마무시하게 좋지 않다 대학병원에서 6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받고 있다
​그렇다고 기가 죽을 녀석이 아니지. 내 눈을 피해 이불 속에, 옷 속에 책을 숨겨서 화장실로 밀수(?)하질 않나,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한테 빌던 소원도 늘 ‘책’이었다.
이번 어린이날 선물도 책10권을 딜 했다.

​솔직히 속으로 생각했다.
‘크으, 주입식 교육 따위 필요 없다. 저렇게 읽어대는데 국어는 평생 따 놓은 당상이지. 고등학교 가면 국어 공부 안 해도 백 점 맞겠네. 효녀다, 효녀!’

​그리고 어제, 모의고사 성적표를 가져왔다.
당당하게 찍혀있는 숫자.
​<국어 : 4 등급 >
​……실화냐?
내 눈이 침침한가 싶어 앞구르기 하고 봐도, 뒤구르기 하고 봐도 선명한 숫자 ‘4’

누구냐? 대체 어떤 위인이 "어릴 때 독서 많이 하면 국어 공부 따로 안 해도 국어 잘 본다"고 했냐?? ㅎㅎ
활자를 그렇게 씹어 삼키더니, 정작 시험 지문은 그냥 눈으로 구경만 하고 온 모양이다. 이것이 말로만 듣던 ‘독서의 배신’인가🤣🤣🤣

​시험 좀 못 보면 어떠랴.
그 수많은 책을 읽으며 다져진 마음의 키는 4등급이 아니라 특등급일 테니.. 그렇게 믿고 싶다, 진심으로

크게 숨 한번 쉬고 , 성적표를 슬쩍 치우며 조용히 읊조려 본다.
"시험 못 봐도 괜찮다, 딸내미야. 건강하게만 자라다오."
근데… 당분간 어린이날 선물은 문제집 10권으로 바꿔야 할 것 같구나.
  • 밀키웨이 2026.06.25
    시험문제를 독서처럼 했나부다 부담없이 ㅋㅋㅋㅋㅋ 그래도 나중에 다 표가 나는법 …
    • 주인 2026.06.25
      ㅋㅋ 그랬나봐요~~
      표가 빨리 나야 할텐데..🤣
  • 주인 2026.06.25
    _댓글부대_ 키친님.사과님.야옹님~~♡♡
    쪼로록 댓글 달린거 보고 미소가 절로 지어지네요~ㅎㅎ😄
   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항상 좋은말씀 감사해요~~ 🙇
    😍사릉 합니더♡♡♡♡😘
  • 해피야옹 2026.06.25
    꼬빙하님의 글을 읽으면 늘 재밌는 수필을 읽는거 같아요~
    일상을 이렇게 재미있게 녹여내서 쓰시는거 보면 독서는 주입식인 시험 문제 보단 살면서 교양이나 삶의지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키우지 않을까요?
  • 사과나무 2026.06.25
    언젠가 발휘되리. 배신없는 독서의 힘😍👍🏻
  • 제이키친 2026.06.25
    책 좋아하는 따님 부럽습니당~📚
    시험 좀 못보는거 암씨랑 안해요.
    지금 독서한거는 평생의 자산일테죠?
    따뜻하게 봐주시는 꼬빙하님이 계셔서 따님은 행복할것같아요. 좋겠다~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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